하회별신굿의 내력

하회별신굿탈놀이(하회별신굿탈놀이는 현지 주민은 '별신'이라 하고, 이창희 옹은 '별신놀이'라 하는데, 하회 인근 지역인 예천에서도 '별신을 논다'는 말을 사용했고, 수동에도 '진법별신놀이'가 있다. 그러나 별신굿과 탈놀이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하회별신굿탈놀이'라 부르기로 한다)는 지난 무진년(1928)까지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에서 이 마을의 비동족 농민들이 놀았던 탈놀이이다. 그 근원은 서낭제의 탈놀이로 우리 나라 가면극 전승의 주류를 이루는 산대도감 계통극과는 달리 동제에 행하여지던 무의식적 전승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면극이라 여겨진다.
별신굿은 매년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동제사와는 달리 3년, 혹은 5년이나 10년에 한번씩 음력 정초에서 대보름까지 행하던(신내림(紳託)에 의하여 열리는) 특별대제이다. 이 때에 탈놀이가 당제와 함께 연희된다. 별신굿의 과정은 신내림을 받는 강신(降神)과 신을 즐겁게 해드리는 오신(娛紳), 그리고 신을 다시 보내는 송신(送紳)과정으로 진행되며 탈놀이는 바로 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한 것이다. 즉 신을 즐겁게 해드림으로써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회리의 서낭신은 '무진생 서낭님'으로 17세 처녀인 의성 김씨라고 하고, 혹은 15세에 과부가 된 서낭신으로 동네 삼신의 며느리신이라고도 전한다.

● 기원과 전설

하회별신굿놀이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느냐 하는 것은 자료의 부재로 인하여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향언과 전설로 미루어 고려 중엽의 것이 아니냐 하는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향언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말은 마을에 가장 먼저 허씨가 입향하여 터을 잡으니 그 후 안씨가 들어와 집을 짓고 뒤이어 들어온 류씨가 판을 벌였다는 뜻이다. 허씨가 마을에 들어온 것은 고려 초기로 알려져 있으니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허씨들이 마을에 터를 잡아 살고 있을 때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재산의 손실이 막대하자 마을 사람들의 걱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사는 젊은 청년인 허 도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지금 마을에 퍼지고 있는 재앙은 이 마을을 지켜주는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 일러주며 "탈을 만들어 춤을 추면 신의 노여움이 풀리고 마을이 다시 평안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탈을 만드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여야 하며 만일 누군가 엿보거나 알게 되면 너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것이다"'고 일러주었다. 허 도령은 꿈이 너무나 기이하고 생시같이 느껴져서 그날부터 동네 어귀 으슥한 곳에 움막을 짓고 다른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줄을 치고 매일 목욕재계를 하며 정성을 들이는 가운데 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마을에는 허 도령을 사모하는 처녀가 있었는데 도무지 허 도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연민의 정이 사무친 나머지 어느 날 금기(禁忌)를 개고 금줄을 넘어 들어가 탈막 안을 엿보고 말았다. 그러자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며 입신의 경지에서 탈을 깎고 있던 허 도령은 그 자리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허 도령이 죽게 되자 처녀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결하게 되니 마을 사람들이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화산 중턱에 성황당을 짓고 처녀를 성황신으로 받들어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허도령이 제작한 탈은 모두 14개(3개 분실)였는데, 마지막으로 제작하던 탈은 턱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미완성의 작품으로 전한다.

● 복원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첫째, 가장 고형이면서도 제작 기법이 우수한 나무탈들이 현존하고 있는 점, 둘째, 별신굿과 탈놀이가 미분화된 형태이어서 탈놀이의 토착적인 기원과 발생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닌 점, 셋째, 전승지인 하회가 서애 유성룡을 배출한 풍산 유씨의 씨족부락인 점 등으로 말미암아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1928년을 마지막으로 별신굿이 중단되었고, 1940년 12월 14일 별신굿의 문맥을 떠나 한 차례 탈놀이가 연희된 사정 때문에 복원 과정에서 초창기 조사 및 보고의 자료적 원형성이 문제되었었다.

처음에는 연극자의 부재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고려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안동시의 뜻있는 청년들이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부활을 위한 모임을 갖고 주로 류한상씨의 전기 자료
('하회별신가면무극조사'(1959) : 하회동에 거주하고 있던 류한상씨에 의하여 문산주를 위시하여 별신굿 놀이를 구경한 노인들을 상대로 70년 전, 31년 전, 18년 전 3회 행사를 조사하여 종합서술한 것)에 의거하여 하회별신굿놀이를 복원 공연(1973)하였는데, 이 때의 공연은 다분히 현대연극적인 성격에 불과했다.
그러다 마침내 김택규, 성병희 두 교수의 조사단에 의해 1928년 마지막 하회별신굿 때 17세 총각으로 각시광대의 역할을 맡아 탈놀이에 참가했던 이창희 옹(1913-1996)의 생존사실이 알려지면서(1978)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전모를 소상하게 밝힐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거의 원형에 가까운 별신굿놀이로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재현된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선보이면서 비로소 중요무형문화재(제69호) 지정이 이루어진다.(1980.11)

하회마을에 대하여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연희되던 하회마을은 물이 돌아 흐른다고 하여 물도리동이라고도 불리우며 특히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는 천하제일의 길지라 하였다. 마을의 형국은 한 송이 연꽃이 물 위에 활짝 피어 있는 모습으로 마을을 감아도는 하천과 산줄기의 모양이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 화산이 있고, 서.남.북쪽으로는 하천이 굽이돌아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외부와 쉽사리 통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며,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은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마을이 지니고 있는 수려한 자연환경과 지리적인 조건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유달리 풍성한 감성을 지니게 하여 반촌(班村)으로써 엄격한 유가적 전통을 잘 유지하면서도 토착적인 민속의 전통까지 훼손하지 않고 잘 전승하게 하여 하회별신굿탈놀이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 도움받은 자료
○ <하회탈과 하회탈춤의 미학>, 안동문화연구소, 사계절, 1999
○ <탈놀이의 기원과 구조>, 박진태, 새문사, 1991
○ <마당굿 연희본(2) 무형문화재 지정종목>, 심우성, 깊은샘, 1988
○ 대구대학교 한맥회 탈춤 자료
○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