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별신굿의 내용

민속놀이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지배계층인 양반과 선비의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지배계층인 양반과 피지배계층인 상민간의 관계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중의 파계를 통하여 당시 불교의 타락상과 종교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상민들의 삶의 애환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별신굿탈놀이를 통하여 상민들은 세상살이를 풍자하고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거리낌없이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지배계층의 비판으로 일관되는 탈놀이가 하회라는 양반마을에서 양반들의 묵인 하에 또는 경제적인 지원 속에서 연희된 것은 상민들은 탈놀이를 통하여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과 불만을 해소 할 수 있으며 양반들은 상민들의 비판과 풍자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불만을 해소시켜 줌으로써 갈등과 저항을 줄여 상하간의 조화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별신굿이라는 마을공동체 신앙에 포함되어 연희되던 탈놀이의 과정을 통하여 공동체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계급간의 모순과 갈등의 문제점들이 완충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것이 새롭게 공동체의 기존체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진행절차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종신적 제관인 산주가 서낭신과 산신에게 치성을 드린다. 섣달 보름날 치성을 드릴 때 산주가 별신굿 개최에 대해서 신의 뜻을 묻는다. 신의 뜻을 확인하면 산주는 이 일을 정식으로 동네의 양반과 어른들에게 알리고 동의를 얻어 별신굿을 준비한다. 만일 비용 등을 이유로 별신굿의 거행을 거부했을 때에는 동민들에게 급병이 생기는 등 동네에 우환이 발생하므로 신의 뜻이 그러하면 반드시 별신굿을 거행한다. 산주는 꿈에 계시를 받은 자가 되는데 박학이 산주(1928년 무진년 마지막 별신굿 때의 산주)의 경우 다음의 일이 있었다.

갑자년(1924년) 11월 17일 늦게 박씨가 인근 친구 지에 놀러 갔을 때, 친구가 없어 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40-50세 가량의 부인신이 나타나 "특히 너에게 명하고 싶은 의례가 있지마는 여기는 타인의 집이니 속히 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기에, 박씨가 "내가 친구 집에 있으니 명을 듣겠다"고 했다. 여신이 말하길 "너를 금후의 산주로 명하는바, 산주될자는 많지마는 특히 너에게 명한다"고 했다. 박씨가 말하길 "나는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니 다른 적당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신이 말하길 "네가 산주로 가장 적당하며, 네가 아니면 불가하다"고 했다. 박씨가 그러면 명에 따르겠노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잠이 깨었다.
박씨는 급히 자기 집에 돌아와 물을 떠 놓고 신에게 빌었다. 자기는 생활고 때문에 신명을 따를 수 없으며, 또 현재 산주가 있으므로 더더욱 그렇다고 하면서 사퇴했다. 그러나 여신이 말하길 "지금의 산주는 너보다 1살 아래지마는 신병 때문에 신의를 도울 수가 없으니 네가 나의 명예 따르라"고 했다. 그 후 신당에 가서 신간을 잡으니 역시 그에게 산주가 되라는 신의 계시가 내렸다. 박씨가 신명을 받아 산주가 된 얼마 뒤에 전산주가 사망했다.

섣달 스무아흐렛날 동민 대표들이 동사에 모여 부정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 배역에 맞춰 광대 12명과 산주 외에 유사 2명, 대 메는 광대와 청광대, 무동꾼 등을 선정하여 본인에게 통보한다. 광대들이 의상과 기타 준비물을 갖추어 동사에 모이면, 섣달 그믐날부터 동사 입구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며 목욕재계하여 합숙을 시작한다. 이 때 동네에선 개고기 등이 부정한 음식을 금한다.

섣달 그믐날 내림대는 든 산주, 서낭대를 멘 광대(2명), 큰 광대, 무동을 탄 각시광대, 양반광대, 선비광대, 그리고 연령 순으로 선 나머지 광대들이 행렬을 지어 풍물을 울리며 서낭당에 올라간다. 이 때 부정이 없는 노인 서너 명도 뒤따른다.
서낭당에 도착하면 서낭대는 당 앞쪽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산주는 당방울을 매단 내림대를 양손에 받쳐 들고 당 안으로 들어가 기대어 세운다. 각시광대는 무동춤을 추며 서낭대를 돌고, 악기를 든 사람들은 풍물을 치며 돈다. 산주가 내림대를 잡고 빌기 시작하면, 각시광대만 계속 서낭당을 돌고 나머지 광대들은 당 앞에 일렬 횡대로 선다.
[사진보기]

산주가 대내림을 빌 때는 "해동은 조선 경상북도 안동 하회 무진생 서낭님, 앉아 천리 서서 만리를 보시는 서낭님이 뭐를 모릅니까... 내리소서, 내리소서, 설설이 내리소서" 하며 마을을 위해 굿을 할 테니 도와달라는 내용을 즉흥적인 말로 빌며, 산주가 내림대를 잡고 정성을 들이노라면, 이윽고 대가 흔들리고 당방울이 울린다. 산주는 재배하고 당에서 물러나와 다시 재배하는데, 이 때 광대들도 함께 재배한다.
산주가 당방울을 내림대에서 서낭대 꼭대기에 옮겨 달면 광대 둘이 서낭대를 메고 앞서고 산주가 그 뒤를 따르며, 나머지는 올라갈 때와 같은 순서로 행렬을 지어 풍물을 치며 하산한다. 각시광대는 역시 무동을 타고 춤을 추며 내려온다. 내려오면서 하당을 거치고, 삼신당에도 들러 참례를 하고서 동사로 온다. 하당에서는 '각시 잠잔다'라는 행위를 하는데, 각시광대와 자식 없는 동네 사람이 동침하는 흉내를 냈으며, 그리하면 자식을 얻는다고 믿었다.
[사진보기]

동사에 오면 서낭대를 마당에 세우고 내림대로 괸다. 산주는 봉납된 옷가지를 서낭대에 매단 다음 서낭대 옆에 자리를 펴고 앉는다. 일설에 의하면 섣달 그믐부터 합숙을 시작하나 정월 초이튿날 동사 다락에서 탈을 꺼내 광대들이 배역에 따라 쓰고서 서낭당에 올라가 대를 내려와서 탈놀이를 하였다고 하여 또 다른 연행 방식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행렬이 동사 마당에 도착하면 각시광대는 무동춤을 계속 추면서 마당을 빙빙 돌다가 청광대가 주는 각시탈을 받아 쓰고서 춤을 추고, 이어서 무동을 탄 채로 꽹과리와 채를 들고 구경꾼 앞을 돌면서 걸립을 한다. 각시광대가 무동춤을 추고 걸립을 하는 동안 광대들은 탈놀이를 준비한다. 각시의 무동춤과 걸립이 일차로 끝나면 풍물을 흥겹게 울리면서 놀다가 주지마당으로 넘어간다. 주지마당에 이어 백정마당, 할미마당, 중마당, 양반.선비마당의 순으로 탈놀이를 벌인다.

○ 주지마당 [사진보기]

아직까지 마을굿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마당으로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꿩의 깃을 단 두 마리의 주지가 나와서 탈판을 돌다 서로 싸움을 벌이는데, 여기에 나오는 주지다툼을 꿩싸움이라 하기도 하고 사자싸움이라 하기도 한다. 액풀이 마당으로 벽사의 의식무라는 의미를 지닌다.

○ 백정마당 [사진보기]

하회별신굿놀이의 본격적인 첫 마당이라 할 수 있다. 도끼와 칼을 든 백정이 등장하여 춤을 추다 소 한 마리를 잡아 우랑과 염통을 꺼내어 구경꾼들에게 파는데, 살생을 하게된 백정은 장사 도중 천둥번개 소리에 기겁하여 도망친다. 이 마당 역시 걸립마당의 일종으로 부패한 양반사회를 비판하는 백정의 대사가 날카롭다.

○ 할미마당 [사진보기]

쪽박을 허리에 차고 흰 수건을 머리에 쓴 할미가 등장하여 베를 짠다. 베를 짜면서 고달픈 인생살이를 '베틀가'에 얹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쪽박을 들고 걸립한다. 각시와 백정에 이어 할미에까지 이어지는 이 걸립마당들은 이 탈놀이의 주제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파계승마당과 양반풍자마당을 위한 도입부 구실을 한다.

○ 파계승마당 [사진보기]

부네(기생 혹은 소실)가 오금춤을 추며 등장하여 치마를 들고 오줌을 눈다. 이 때 중이 등장하여 이 광경을 엿보다가 흥분하여 부네를 옆구리에 차고 도망간다. 이 마당은 대사없이 진행되며 고려 말 부패한 불교상를 풍자하고 있다.

○ 양반.선비마당 [사진보기]

양반이 하인인 초랭이를, 선비는 소첩인 부네를 데리고 나온다. 양반과 선비가 서로 문자를 써가며 지체와 학식을 자랑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초랭이는 양반과 선비사이를 오가며 양반사회를 풍자한다. 서로 화해한 양반과 선비가 춤을 추고 놀 때 이매탈을 쓴 별채가 나타나 환재를 바치라고 외치면 모두 깜짝 놀라 허겁지겁 도망간다. 관리의 가렴주구를 풍자하고 있다.

무당이 없을 땐 서낭대.산주.큰 광대.각시광대.양반광대.선비광대 순으로 행렬을 짓고 나머지는 연령 순으로 행렬을 지어 길놀이를 하는데, 무당이 오면 무당은 서낭대 뒤에 서고 산주와 광대들은 서낭대 앞에 서서 길놀이를 했다. 먼저 산주 집에 가서 놀고 삼신당을 한바퀴 돌고 난 뒤에 양진당과 충효당에 가서 놀고, 남촌댁과 북촌댁에도 간다. 겸암댁과 남촌댁은 광대들이 사랑채 앞에서 놀고 무당들만 안채에 들어가서 성줏굿을 하는데, 서애댁과 북촌댁은 안마당에서 탈놀이를 하고 무당들은 안마루 위에 올라가 성줏굿을 한다. 탈놀이는 한 마당이나 두 마당이나 놀고 싶은대로 하는데, 여섯 마당 전부를 할 수 있는 건 이들 네 집뿐이다.

대갓집을 방문하면 산주는 서낭대를 처마에 기대 세우고 그 밑에 자리를 깔고 앉으며, 그 지에서는 서낭대 앞에 쌀이나 나락을 몇 말씩 내놓는다. 대갓집에서 양반.선비마당을 놀 때, 선비광대는 대청마루에 올라가 유씨 양반과 직접 맞대면하여 수작을 걸고, 풍자적 사설로 양반을 골려 주어도 이 때만은 탓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년(1924)과 무진년(1928)에는 유씨들이 양반.선비마당을 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초청했기 때문에, 양반광대가 "이번에 예전 그대로 했으면 그놈들 낯짝에 똥칠을 세게 할 건데 그걸 못하게 하니 할 수 없다. 내가 대청에 올라갔으면 저놈들 낯을 뜨겁게 해 줄 건데 그걸 없애서 못한다"라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
양반집 아닌 작은 집은 지신밟기만 하고 탈놀이는 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곡물이나 폐백주식을 대접하는데, 새각시가 있는 집은 속치마를 서낭대에 걸어 득남을 빌기도 했다. 대갓지에 가면 광대가 판을 휘어잡았지만 작은 집에선 무당이 지신밟기를 주도했다.

탈놀이와 지신밟기는 14일까지 계속하는데 서낭각시의 친정인 월애(다릿골)에 가서 놀기고 하고, 고모 집이 있다는 광덕동에도 간다. 동사 앞에서 무당들이 놀이판을 벌일 때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았으며 술 취한 사람은 무당과 같이 춤추기도 했다. 한편 동사 앞에서 산주가 월애에 사는 두 남녀를 벌준다고 깔고 뭉개었는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정월 보름날 아침 식사를 마치면 청광대가 탈을 담은 섬을 지고 서낭당으로 올라간다. 당의 처마에 서낭대를 기대 세우고 당 안에서 산주가 당제를 지낸다. 헌작과 재배에 이어 축문 없이 비손으로만 축원을 올리고 종일토록 소지를 올린다. 순서는 먼저 서낭님 소지, 산주 소지, 광대 소지(15명 몫), 다음에 동네 문장 소지를 비롯하여 각 호주 소지, 우마의 소지를 올린다.
그 동안 광대들은 탈을 쓰고 탈놀이를 하는데, 음복하고 쉬다가 다시 놀기를 종일토록 한다. 무당들도 한쪽에서 논다. 일몸쯤에 탈놀이를 마친다. 서넝대의 당방울은 풀어 탈과 함께 섬에 달아 청광대가 짊어지고, 서낭대는 옷이나 예단은 풀고서 서낭당의 뒤처마에 얹어 놓은 다음 모두 하산한다. 양반광대, 각시광대, 청광대만 남고 산주와 다른 광대들은 귀가한다.

마을 입구 진밭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멍석을 깐 뒤 초례상 턱으로 무당에게서 빌린 장고를 하나 세운 다음, 그 위에 꽃갓을 하나 올려놓는다. 각시광대가 각시탈을 쓰고 신부가 되고, 청광대가 선비탈을 쓰고 신랑이 되어 탈을 안 쓴 양반의 주재하에 혼례를 치른다.
[사진보기]
예가 끝나고 양반이 "신방 들어가라" 하면 멍석 위에 장고를 치우고 신랑이 신부를 눕히고 올라탄다. 각시광대는 양반광대가 시키는 대로 "아야" 소리를 세 번 한다. 이 모든 일이 진지하고 엄숙하게 진행되는데, 이는 서낭각시와 허도령을 결혼시키는 턱이며, 이 때 청광대는 동네 사람 중에서 아들이 없어 아들 낳기를 원하는 사람이 된다.
[사진보기]

이윽고 모든 과정이 끝나고 각시광대가 청광대에게 탈을 주고 귀가하면 청광대는 탈이 든 섬을 동사에 갖다 보관한다. 이어서 동네 어귀에서 암무당 1명, 수무당 2명이 잡귀잡신을 퇴송시키는 허천거리굿을 하는데 유사와 사령(뱃사공)이 뒤치다꺼리를 한다.
그 이튿날 서낭님께 바친 옷을 다시 사다 입으면 복을 받고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그렇게 한다. 옷을 판 돈과 별신굿 동안 거둬진 곡식이나 돈은 정리하여 별신굿 경비로 충당한다.

하회별신굿의 구성

오늘날과 달리 탈놀이 광대들이 풍물패를 겸했고 마당과 마당 사이에 한 차례씩 풍물(주로 세마치 장단)을 울려 마당을 구분하였다.  춤이나 동작은 놀이할 때 서낭님이 시켜서 저절로 하게 된다고 일러오며, 다른 탈춤의 경우처럼 분명하지 않고 즉흥적이며 일상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예전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 신성한 별신굿을 하는데 여자들이 참가할 수 없어 모든 탈꾼은 남자들로 이루어졌었다.

더 많은 사진 보시길 원하시면...

● 도움받은 자료
○ <하회탈과 하회탈춤의 미학>, 안동문화연구소, 사계절, 1999
○ <마당굿 연희본(2) 무형문화재 지정종목>, 심우성, 깊은샘, 1988
○ 대구대학교 한맥회 탈춤 자료
○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자료집
○ <탈놀이의 기원과 구조>, 박진태, 새문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