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굿의 발달과정

● 기원

풍물굿의 기원은 멀리 수렵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원시시대의 풍농.안택을 비는 제천의식이나 노동의 율동에서 풍물굿이 출발하고 이것이 점차 집단생활 속에서 놀이, 축원, 연극형태로 발전되어 사람들이 즐기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시대의 제의형태는 아직 종교적 의식을 주재하고 대행해주는 무당[샤만]이 나타나기 이전이므로 집단적 신명을 통해 신과 만나고 기원하는 형태였으며, 풍물굿의 원시적 형태로서의 집단춤과 간단한 타악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장구한 역사 속에 생성된 고유한 정서와 생산수단의 발달은 풍물악기의 구성이나 형태, 장단들을 변화시켰을 것이다.


● 초기 발달과정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 영고 등의 축제에 이미 북이나 쇠를 사용하였다고 하며, 백제 가면굿의 미마지가 일본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는 기록도 찾아 볼 수가 있다.
이렇듯 원시적으로 지속되던 풍물굿은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생활 전반에 고르게 확산되는 양상을 띈다. 태조 때(918)부터 궁중행사에 풍물굿이 등장하였으며 사찰이나 민가에서도 중요한 연중행사 때에는 없어서는 안 될 음악이었다. 또한 풍물굿은 농사일을 할 때나 부락의 제사(당산제, 기우제) 때도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었다.


● 조선시대

이 시대에 들어 풍물굿은 더욱 보편화되어 가는 한편, 연희적 기능이 급속히 추가되면서 의식성이나 노동음악으로서의 기능이 줄어든 면이 없지 않았으며 조선조의 일방적인 억불 숭유정책으로 인해서 시련을 겪게 된다. 패속이란 이름 하에 뿌리깊은 일상적 풍습이 상스러운 것으로 잘못 매도되면서 풍물굿도 덩달아 푸대접을 받게 되는데 민중의 의지가 집결되는 당굿이 잘못 인식되고 무속 전체가 '무꾸리'란 이름하에 강압적으로 이간되면서 풍물굿은 넓은 서낭당의 굿판이나 들판의 일터에서 밀려나 골목과 사사로운 마당놀이로 변색되어 간다.

○ 전기(발달배경 - 불교의 쇠퇴)

이 시기에 이르러 불교의 탄압과 함께 각 사찰의 경제 기반이 크게 약화되자 절의 신.증축이나 중요한 불교행사 때 불교음악이나 의식춤에서 나오는 연희형태를 가지고 민가에 내려와 다니면서 자금을 얻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기층 민중의 미의식에 알맞은 형태들을 풍물굿에 도입하고 활용했을 것이다.

○ 중기(발달배경 - 이앙법의 도입)

'
두레'는 조선 중.후반기에 이앙법(모내기)이 들어오자 농업생산방식의 특징상 농번기(모내기, 김매기)의 절기마다 집약된 노동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노동조직인데, 이러한 집약된 노동이 효율적인 노동관리체계를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또한 두레는 풍물굿의 존재토대였으며,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풍물굿의 모습은 두레라는 조직이 새로 생기면서 가능해진다.

○ 후기(발달배경 - 상업의 발달)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사회는 상품화폐관계의 발전으로 상업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두레풍물굿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기량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걸립풍물굿으로 변모하게 된다. 판굿의 발전도 이 때부터 활발해진다.
19세기 말 경에는 아예 자기 마을의 근거를 떠난, 즉 노동으로부터 분리되고 기량이 뛰어난 풍물꾼들이 전문 사당패로 나서게 되는데, 이는 조선후기 생산력의 발전으로 농촌사회가 분화되고 피폐해지면서 생긴 결과이다. 사당패는 전국 각지를 돌며 연행을 하기 때문에 각 지역의 풍물굿이나 재주를 흡수하고, 동시에 각 지역의 풍물굿 발전에 기여했다.


●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이하 '일제')의 강제적인 조선침략은 민중의 독자적 문화로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풍물굿을 왜곡하고 역사적으로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적으로 두레조직을 통해 상부상조하던 공동노동의 성격이 상호노동의 대가를 화폐로 지불하거나 부역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노동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두레풍물굿은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의 일환인 농업수탈정책에 이용되어 노동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풍물반주나 기방의 눈요기거리로 전락하였으며, 사당패 중 일부는 조선총독부의 전선농악대에 흡수됨으로써 민중문화의 내용을 상실해 버린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인 민족문화말살정책은 풍물굿을 낭비적인 것, 미신적인 것으로 매도하여 민족문화로 성장할 길을 차단하고 실제의 지니고 있던 대동놀이굿의 성격을 상실한 기능만의 풍물굿으로 박제화시킨다.(명칭 역시 일제에 의해 '농악'으로 바뀐다.) 심지어 일제 말기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수물자 헌납을 빙자해 마을마다의 풍물(악기)을 몽땅 빼앗아가기도 한다.


● 해방 이후∼1970년대까지

일제시대 때부터 박제화되기 시작한 풍물굿은 1945년 해방 이후 잠시 되살아나는 듯 했으나 한국전쟁과 급격한 공업화 정책으로 인하여 역사적 단절을 극복할 기회마저 잃어버린다. 또한 서구문물의 숨막히는 홍수 속에 대다수 민중들이 향유하던 풍물굿은 미개스런 광음이란 반주체적 오판아래 다시금 현장에서 밀려나고 만다. 한편 60년대 이후의 새마을운동을 통해서는 농촌에서나마 간신히 남아있던 풍물굿을 '미신'이라는 굴레를 씌워 말살시킴으로써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민중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70년대 유신통치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양심적 지식인들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우리 것 찾기 운동'의 일환인 '탈춤부흥운동'이 발전한다. 이는 관 주도적인 형식적 전통문화계승에 반발해서 형식과 내용을 함께 담보해낼 수 있고, 공동체적 신명을 확보해낼 수 있는 문화전승이란 목적 아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한편 탈춤부흥운동의 연결선상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풍물굿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이러한 때에 과거 남사당에서 잔뼈가 굵은 20대 젊은이들이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굿판을 벌이게 된다(1978년 2월). 사라져 가는 굿판에 대한 아쉬움과 정체성 회복의 몸부림이었던 사물놀이는 여러 방송매체와 다양한 무대공연 속에서 많은 대중들에게 퍼지게 되는데, 그것은 곧 1980년대의 또 다른 풍물굿판의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제3공화국) 국가 주도의 '전통문화 복원운동'이 있었는데, 이는 전통문화를 형식적 측면에서만 복원을 시도함으로써 관제화시키고, 관광을 위한 상업 예술화하여 박물관 문화로 남게 하였다. 무형문화재 지정이나 인간문화재 지정이 그러한 예이며, 이후 '국풍', '전주 대사습놀이', '민속경연대회' 같은 행사로 이어진다. 이러한 정책이 단절된 전통문화를 형식적으로나마 복구하는 데에는 일정 정도 기여한 바가 있으나 민중적 내용을 상실한 전통문화의 복원은 지배층의 지배논리를 대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 1980년대 이후

전통민속연희를 계승하고자 하는 흐름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80-83년) 5공 정권의 민중운동에 대한 폭압적인 탄압으로 일시적인 침체기를 거친다. 그러다가 1983년 말에서 1984년 사이에 민중 운동의 성장으로 말미암은 정권의 유화조치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장르확산이 이루어지면서(탈패를 중심으로 풍물패, 민요패, 미술패, 노래패 등으로 확산) 풍물굿도 본격적인 대중장르로 자리잡는다.
그 후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보여준 풍물굿의 적극적인 역할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풍물패의 조직을 가속화하고 사회 각 방면으로 폭 넓은 확산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풍물굿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다양화시킴으로써 그들의 표현양식 또한 다르게 표출되기도 한다.


● 풍물굿의 현실과 나아갈 길

오랜 세월 농촌사회에서 자리매김하고 생활의 윤활유로서 자리잡았던 풍물굿이 오늘날에 와서는 농촌 지역의 피폐와 이농현상으로 인한 보유 인원의 부족으로 현장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그리고 비록 국가의 보호 정책 하에 보유되고는 있다지만 박제화된 문화형태로 전락해 버린지 오래이며, 대학가에서 행해지는 풍물굿 역시 어떤 짜집기 식의 잔가락을 쳐서 즐기는 사물놀이 형태나 극히 부분적인 악보의 전승 형태에만 그치고 있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풍물굿은 "학생운동의 선전.선동수단"으로만 사용된다는 인식이 정착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풍물굿은 한국사회의 모순구조 심화에 따라 계속 쇠퇴의 길을 걸어 왔으며, 그리하여 현재의 지배문화 밑에서 그 정신이 단절된 듯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옛 선인들의 생활문화로서 면면히 이어온 풍물굿이 근래 들어 그 본디 모습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단지 시끄러운 타악의 음률로만 전달, 인식되고 있는게 현실이기도 한다. 그것은 풍물굿이 우리의 삶의 체계 속에서 '절대 분리해낼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정착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또 그래야만 풍물굿의 발전과 더불어 삶의 발전도 함께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풍물굿이 농촌지역이나 노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젊은이들도 어느 현장에서건 함께 할 수 있을 때 넓은 의미의 풍물굿판은 열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 도움받는 자료
○ <풍물교실>, 풍물춤패 '깃발', 민맥, 1991
○ <풍물굿에서 사물놀이까지>, 김헌선, 귀인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