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우리에게 아리랑이 있다. 가끔은 눈시울을 붉히며 뜨거운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 이 노래는 아주 오랜 옛적부터 불려온 아름다운 노래이다. 가슴을 저리게 하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겼듯이, 이 노래에도 슬픔이 담겨있다. 우리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에도 그만큼의 비극이 배어있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오랜 동안 모두에게 애창되어 왔다.
굳이 50여종의 갈래에 6천여수의 노래말이 적층되어 왔다는 사실로 해서 '노래의 역사'로 담보하지 않았다 해도, 1990년 남북한이 단일팀 단가로 합의하여 '역사의 노래'로 담보하지 않았다 해도, 거기다 2001년 세계 유네스코가 '아리랑상'(Arirang Prize)을 제정하여 세계무형문화유산의 상징어로 해서 '세계의 노래'로 담보하지 않았다 해도, 아리랑의 위상과 현재적 가치는 분명하고도 뚜렷하다. 그 뚜렷하고 분명한 아리랑의 위상과 가치란 두말할 나위 없이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사실이다. 한민족 아리랑(신나라레코드) 중에서

● 아리랑

한국의 대표적 구전민요의 하나. 어느 시대부터 발생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고래로부터 조금씩 첨가ㆍ개조되면서 오늘의 노래가 이루어진 듯하며, 남녀노소 사이에 가장 널리 애창되었다. 아리랑이 넓게 퍼지고 생명이 길었던 이유는 기본장단이 세마치로서 우리의 정서에 맞을 뿐더러 한말(韓末)에 일제의 암흑기를 통하여 겨레의 비분을 이 노래에 얹어 호소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방에 따라 여러가지 별조(別調)아리랑이 많고 장단과 사설도 매우 다양하다. 즉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의 곡조와 같은 것이나, 그밖에도 밀양 아리랑ㆍ강원도 아리랑ㆍ정선 아리랑ㆍ진도 아리랑ㆍ긴 아리랑ㆍ별조 아리랑ㆍ아리랑 세상 등 매우 많다.
그 유래설도 갖가지인데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아랑설

경상도 밀양 아랑 처녀의 원귀(怨鬼)에 얽힌 이야기(밀양 아리랑)

○ 알영(閼英) 고개설

1)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기 위하여 "알영 알영"하고 노래 부르던 것이 아리랑으로 음변하였다는 설 2) 알영비가 알영정(閼英井)의 계룡(鷄龍)의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는 그 우물로 올라가는 알영 고개가 아리랑 고개로 음변하였다는 설 3)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重修)할 때 원납금(願納金)을 바치라는 성화에 "원하노니 이내 귀 어두워져라, 원납소리 듣기도 싫다(但願我耳聾 不聞願納聾)."라고 하는 시(詩)가 전해지는 동안 아이롱(我耳聾)이 변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

○ 아난리설(我難離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그 괴로움을 못 이기던 백성들 사이에서 "고기는 물에서 노는데, 우리는 고생도 많구나(漁遊河 我多苦)."라는 노래가 유행했는데, 대원군이 무리하게 강행한 경복궁 중수 때 징발된 인부들 사이에서 이를 본받아 "고기는 물에서 노는데, 우리는 떠나기도 어렵구나(漁遊河 我難離)."하고 부르던 아난리(我難離)가 아라리요로 변했다는 설

○ 아랑위설(兒郞偉設)

동ㆍ서ㆍ남ㆍ북ㆍ상ㆍ하로 써 붙이던 상량시문(上樑詩文) 중 "아랑위포량동(兒郞偉抛樑東)" 등에 나오는 아랑위(兒郞偉)가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여러 발생설이 전해지나 오히려 구음(口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정선아리랑

 정선엮음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경기아리랑

 

● 일본의 아리랑

○ 일본속의 아리랑( 김경원의 글 중에서)

"아리랑은 고난의 꽃이다." 한 시인의 이 지론에 따른다면 백여년 전으로부터 시작된 한민족의 해외 유이민들이 피워낸 아리랑은 그야말로 꽃 중에 꽃이 아닐 수 없다. 조국으로부터 내몰려 살길을 찾아 떠난 것이었고 탄압을 피해 망명을 했던 이들의 아리랑이기 때문이다.
이들 교포사회의 아리랑은 국내 아리랑보다 더 아픈 사연을 지닌 것들이다. 그들은 고국을 원망하며 단봇짐 하나에 아리랑 한 수를 가슴에 담고 떠나 척박하고 텃세 심한 이국 땅에서 살아 왔으니 고난의 땅으로 말한다면야 이곳 보다 더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중에서도 더욱 아픈 곳은 인접국으로서 역사 관계를 맺어온 일본으로서 극심한 차별대우까지 받으며 살았으니 어느 지역보다도 아픈 아리랑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일본 속의 아리랑이란 일제 초기부터 일본인 자신들이 기록했거나 나름대로 만들어 부른 아리랑, 또는 해방 전 조선인들이 부르던 아리랑 또는 북한 음악의 영향하에 있는 조총련들에 의해 불려지는 아리랑, 그리고 이 시대에 창작되어 불려지는 아리랑. 이렇게 4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이 아리랑들은 단순한 해외확산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의 구체적인 증언이란 점에서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리랑의 노래

 

○ '이츠키 자장가'와 아리랑

이츠키 자장가(五木 子守唄) - 이 노래는 "일본의 아리랑"이라고 할 만큼 일본의 대표적인 민요이다. '오도마 이야 이야'로도 불리는 이 노래는 놀랍게도 임진·정유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구마모또현(熊本)의 이츠키라는 오지에 들어가 살면서 조국을 그리며 부른 노래라고 전해오는 것이다. 처음 이 노래를 부른 이들은 포로 중에서도 도자기 기술이나 기와제조 같은 기술이 없는 이들로 구마모또 성 축성이 끝나자 내어몰린 이들로, 고난을 견디며 부른 노래라고 한다.
그런데 이 노래를 조선의 노래 또는 아리랑의 한 가지라고 보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그 하나는 1994년 한 TV 방송 프로그램에서 당시 일본에 있던 작곡가 길옥윤씨와 도공 심수관씨가 이 노래에 대해 언급하면서 "조선의 노래가 분명합니다. 직관입니다."라고 한 사실이 그것이다. 또한 김경원은 1995년 '일본민요 이츠키 자장가와 아리랑의 관계'이란 글에서 ①이츠키 지역의 역사적 배경 ②후렴(전렴) "오로롱 오로롱 오로롱바이"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근친성 ③"간진간진"의 해석 여부 ④3박자 계열이라는 특징 ⑤일본의 일부 민속학계의 의견(소수이긴 하지만)등을 염두에 둘 때 아리랑과의 연관성은 분명히 있다고 밝히고 있다.
민속학자인 마츠나가 고이치松永伍一는 1964년에 발행된 그의 저서 '日本의 子守唄' (紀伊國屋書店 發)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으로부터 끌려온 도공들이 망향의 그리움을 노래'아리랑'에 실어 불렀었는데, 함께 일하던 아이를 돌보던 소녀들이 그 선율에 가까운 노래를 만들어내었다. '이츠키 자장가'는 그러한 여성들과 피부락 사람들의 합작노래라고 볼 수가 있다."
아리랑의 노랫말을 집대성한 '아리랑'(金煉甲편저,현대문예사 1986년 發)에는 '밀양아리랑'의 노랫말들이 채록되어 있는데 노랫말 일부중 내용이 같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애창되어지고 있는 민요는 이 규우슈우지역의 이츠키마을에서 발생한 민요 '이츠키(五木) 자장가'이다. 이 노래가 바로 3박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이츠키(五木)는 구마모토(熊本)현 산중에 있는 작은 마을이름이다.
NHK라디오를 통하여 '이츠키의 자장가'를 전국적으로 방송했는데, 그때부터 이 자장가는 일본인의 대표적인 애창가가 되었고 이 마을 사람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 이 노래의 주제를 나타내는 아이를 업고있는 모자상(母子像) 즉 기념동상까지 세워 이 노래의 탄생지임을 기념하고 있다. 또한 매해 '이츠키 자장가'의 경창대회와 축제까지 열고 있다.
이 소리를 불렀던 도오사카 요시코(堂坂ヨシ子)라는 할머니는 1995년경 "후렴부분은 한국전쟁 종전부터 자연스럽게 부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한적이 있는데 이는 우리와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한 단서라고 생각된다.
 

 이츠키 자장가

 

○ 신나이 아리랑

신나이(新內) '나의아리랑' - '신나이'란 1700년대 말에 성행한 일본 전통 창(唱)의 한 유파이다. 당시에는 무사계급 층에서 향유되던 것이 차츰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작·창자인 오까모토 분야(岡本文彌)선생은 1895년생으로 1957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활동, 1968년'시주호쇼'상을 수상하는 등 이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소화(昭和) 초기 '짖어라 백성이여'로부터 많은 작품을 지어 불렀고 '나의 아리랑'은 1992년 작이다. 선생은 고령의 현역 예인으로도 잘 알려진 이로 지난 1999년 작고했다. 필자는 선생이 1백세를 넘기고도 무대에 선 1995년 3월 21일, 도쿄의 전용 공연장 '요츠야 그라브'에서 만나 '나의 아리랑'에 대한 배경을 들은 바 있다. 선생은 "1940년대 초 조선방송협회(J·O·D·K 현 KBS) 출연을 위해 방한한 바가 있었는데 당시 남대문에 있는 한 요리집에서 이수정(李水晶)이란 기생으로부터 아리랑을 듣게 되어 그 정감을 내내 잊지 못했다. 그러던 터에 일본 정부가 정신대(위안부) 문제에 정정당당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라도 이 문제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어 그 사죄의 마음을 아리랑에 연결하여 지은 것"이라고 했다.
위안부의 한스런 회한을 일인칭으로 하여 시작하는 창은 역시 한일 관계사의 구체적인 증언이 아닐 수 없다.
 

 노래

 

○ 아리랑을 부르는 식민지 청년

며칠 후 다카하시 부인이 마을 소학교 강당에서 학예회가 끝나고 노래자랑을 한다면 내 팔을 끌었다. 아동들의 단막극이 끝나고 여흥으로 노래 자랑이 시작되었다.
"노래 한번 하세요. 광산에서 가장 지적인 남성 아닙니까. 자 나가서 노래 한번 불러 보세요."
다카하시 부인은 나를 자꾸 충동질하더니 급기야 사회자에게 나를 천거하였다 주저주저하고 있는데 광부 이복술군이 덩달아 일어나 무대 연단으로 나를 밀쳐냈다.
"정형, 늘 부르던 노래 있잖아, 한가닥 뽑으라구."
그러자 사회자는 즉시 나를 소개하였다.
"에- 광산의 젊은 총각, 부를 곡목은 '아리랑' 조선의 민요곡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의 노래가락은 구성지다 못해 서러운 애조마저 띄어갔고 벽촌에 사는 일본의 아낙네들의 정서를 흔들어 놓고 말았다. 인간이 창조해낸 여러 예술형태 중에서 언어의 장벽 없이 공감의 띠를 형성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음악일 것이다. 한 번은 우리말 가사로, 또 한 번은 즉석에서 일본어 가사로 바꾸어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려놓고 말았다. 강제 징용자의 수기 <북해도의 겨울> 179∼180
 

 노래

 

○ 조선의 아리랑

아리랑은 경우에 따라서는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의 노래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노래 이기도 하고, 조선의 역사와 희노애락을 그대로 노래에 담은 민요이다. 옛부터 일본에서 일본어의<아리랑>이 유행한 적이 있지만 가사나 곡도 상당히 비속화되었으므로 바른<아리랑>은 아니다. 다음의 <아리랑>은 <新아리랑>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으로 조선의 전국 공통이다.

 신아리랑


일본의 많은 가수들이 의외에도 고가마사오(古賀政男)의 편곡 아리랑의 존재를 잘못 이해하여 아리랑이 자신들의 노래라고 알고 있기도 하다니, 혹시라도 이 것을 듣는 일본 청소년들이 후에 아리랑이 훼이 로브스키의 창작이라고 하지는 않을런지 우려되기도 한다. 노랫말은 우리가 잘 아는 것으로 일어와 영어로 불렀다.
 

 아리랑 모정

 아리랑 제주도

 아리랑 부산항구

 나의 아리랑

 

○ 청하(淸河)아리랑

원제는 '청하의 길~48번'이다. 교포 2세 박영일(新井英一 ·아라이 에이찌)이 아버지의 고향 조선 경북 포항의 영일만과 인접한 청하를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총 48절에 담은 서사적인 노래다. 재일교포사(史)의 축도(縮圖)이다. 필자는 1995년 일본에서 '패전 50주년 TBS TV 메인 뉴스 테마뮤직'으로 뉴스 끝에 방송되는 이 노래를 감명 깊게 들은 바 있다. 그 감동으로 필자는 이 노래를 MBC TV와 '조선일보'를 통해 알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우리말 버전 녹음을 마친 날 그의 집을 방문한 바도 있다.
일본에서는 최근 7집 앨범을 발매했고 나름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데, 음악평논가 가와카미 히데오가 쓴 글에서 아라이 에이치와 이 노래의 배경을 살필 수 가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 아리랑의 한 구절을 따온 3박자의 힘찬 멜로디 라인과 애수감 넘치는 아라이의 구성진 목소리는 일본인의 향수를 자아내어, 나이든 사람들의 감성을 표현하고 공감해 줄만한 노래에 굶주리고 있던 일반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재일 한국인 2세로서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그는 25세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지금은 50세. 1년에 120회 이상의 공연을 하는데, 청중의 90퍼센트 이상이 그가 부른 노래의 포로가 되어버린 팬들이라고 한다. 남의 나라 일본에서 보낸 소년시절, 15세에 집을 나가 이와쿠니에 있는 미군기지로, 거기서 만난 흑인음악이 그가 역경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 "
이번 음반에 수록한 부분은 마지막 장인 '가족' 부분으로 41절부터 마지막 48절까지이다. 일본어와 우리말 버전 모두를 수록했다. 일본 속의 동포들이 부르는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수록할 수 있게 허락해 준 아라이씨와 국내 초청공연 기획자 배지원씨께 사의를 표한다.
 

 청하아리랑(淸河로 가는길)

 

● 미국의 아리랑
 

 상항(桑港)아리랑


○ 미국속의 아리랑

1995년 8월 31일, Stanford 대학 Hoover 연구소에서 만난 님 웨일즈의 친필 자료들은 마치 1941년<Song of Ariran>의 당시 상황을 만나는 듯 자못 경건함이 들기까지 했다. 달필의 만년필로 여성답지 않은 활달한 필체의 원고에서"korea"나"Revolution"이나 "Ariran"이란 단어가 눈에 띨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자료(원고)들이 한국과 김산(장지락)선생의 기록이기에 우리 나라의 어떤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청춘을 조국 혁명을 위해 투쟁하며 강대국 미국의 한 기자에게 조국이 반드시 열두 고개를 넘어 혁명을 이룰 것이라는 신념을 호소할 때의 그 투지에 찬 모습을 그려보기 까지 했다.
그러나 어쩌랴. 조국은 지금 도리어 남과 북으로 갈리어 있고, 그래서 선생의 생애와 사상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팔도아리랑기행(Ⅱ)에서
 

 님 사랑 아리랑

 아리랑 고개(ARIRANG HILL)

 

○ <Song of Ariran> 독서 시절 회고

아마도 1960년경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컬럼비아대학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3,4년쯤 지난 후였을 때니까. 필자는<아리랑>에 대한 이야기를 '형제주점(兄弟酒店)에서 처음 들었다. '형제주점'이란 컬럼비아대학 브로드웨이 거리에 있는 싸구려 선술집 'WEST END BAR'를 말한다.
당시, 대학 도서관 문이 닫힐 밤 늦은 시간이면 그곳을 빠져 나온 학생들이 '형제주점'으로 몰려와 만원을 이루기 일쑤였고, 한국 유학생 5,6명도 항상 그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만남의 장소를 '형제주점'이라 불렸다. 이 주점은 당시 고학을 하던 우리들에게는 유학생 간의 활기찬 대화의 장소인 동시에 학생운동을 비롯한 각종 행사의 요람이기도 했다.
바로 그 '형제주점'에서 30년 전 필자는 우리 동문 한 사람으로부터 <아리랑>에 대한 열띤 독후감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감명 깊게 경청했던 것이다.   <미완의 해방 노래>(백선기 1995 정우사)서문 중에서
 

 아리랑

 

○ 김산과 아리랑

1930년 11월, 김산(장지락)은 중국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어 전향 거부자로 일본 영사관을 거쳐 일본 경찰에 인도되었다. 이 혹한의 계절에 김산은 이듬해 4월 까지 6개월을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이때 김산은 감방 벽에 이렇게 썼다. "이곳에서 다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고문을 견딘 끝에 석방이 되었다. 그리고 김산은 그 고난의 기간을 이렇게 말했다."나는 일본 감옥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과 심리상태에 대한 압력을 최악의 방법으로 실험 받았다. 나에게 그 이상의 어떤 시련이 닥치겠는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아리랑을 불렀다고 했다. 이는 마치 '죽음을 이마에 달고'일을 하는 뗏목꾼들이 뗏목 위에서 절망과 공포의 순간을 잊으려 아리랑을 불렀듯, 김산도 그렇게 아리랑을 불렀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김산은 아리랑에 대단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드시 '아리랑 열 세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의지를 마치 신앙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의 회고에 이런 기록이 있다. "조선사람들은 '아리랑 열 두 고개'에서 다음 '열 세 고개'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바로 지금 조선이 그 열 두 고개를 넘어 열 세 고개를 넘으려 한다"
여기에서 '아리랑 열 세 고개'의 의미는 극한 상황을 극복한데서 맞는 해방이며 독립이며 자유인 것이다. 그렇기에 김산에게 있어 아리랑은 곧 나라(國), 혁명된 나라, 강대국의 예속에서 자유로운 나라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재일동포 잡지<아리랑>1997년 8월호 김연갑의 글〈3국 쟁점 인물 김산〉

그는 겨우 나이 서른두 살의 / 멋진 젊은이었지 /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 노력했고 /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네
그는 아리랑 열두고개를 넘었지 / 마지막 고개는 그의 운명 / 그는 1938년에 / 사형당했다고 했네
장엄한 오페라의 비극과도 같은 / 선과 악의 싸움 / 중세시대와도 같은 어둠에 의해 / 새로운 사상이 파괴되였네
그는 아리랑 열두고개를 넘었지 / 고개마다 대패했지만 / 스스로에게만은 승리를 얻었네 / 그곳에서만은 후퇴하지 않았네 / 그는 자신에게 명령했지 / 고문과 고통을 알았지만 /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 자신에게 명령하고, 또 명령했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면 / 새로운 종교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 / 우리에겐 신성함을 기릴수 있는 / 순교자가 필요하지   (님 웨일즈가 김산을 기억하며 최근에 지은 시)

다음은 김산이 중국에서 즐겨 부르던 아리랑연가이다.
 

 아리랑연가


○ 아리랑 옥중가

이 노래는 조선의 정치범들이 자주 부른다. 1921년, 투옥된 한 조선 공산주의자에 의해 지어진 이 노래는 죄수 경험을 여러 단계로 말하고 있다. 즉 경찰에 의한 체포,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 '한강 펌프'라고 명명된 물고문, 사형선고의 기다림, 그리고 다른 혁명가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종래의 열두번째 고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승리 즉 아리랑의 열세번째 고개를 쟁취할 것을 의미하는 마지막 구절 등이다. 간이역과 기차에 대한 언급은, 오늘의 죽음이 우선 고개 넘어 교수대까지 걸어가야 했던 옛날보다 더욱 빠르게 그리고 쉽게 이루어짐을 뜻한다.
 

 아리랑 옥중가


"한국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이다. 심금을 울려주는 미(美)는 모든 슬픔을 담고 있는 듯 하여 매우 슬픈 노래이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백년 동안이나 모든 한국인 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그런데 이 같은 김산의 구술이 님 웨일즈에게 전해진 곳은 중국에서지만 이것이 정리된 곳은 바기오섬이고, 다시 <Song of Ariran>으로 출간되어 독차층에 전해진 것은 미국에서다.

우리 동포들의 하와이 이민(엄격히 따지면 유민이다)역사는 1903년 1월 15일, 태평양기선 SS게릭호 편으로 2명의 통역인과 함께 하와이에 도착한 25명에 의해서다. 이들은 <설탕재배협회> 노동자로 팔려가 살게 되었다. 이후 1905년 노예처럼 살고 있음이 고종에게 보고되어 1909년까지 이민이 중단되었었다.
그러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건너간 이들에 의해 아리랑이 불려졌다. 이들의 아리랑은 참혹한 사탕수수밭 노동의 아픔이 담기게 되었다. 그 실상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도 확인이 된다. 서사시〈사탕수수아리랑〉작품도 그런 상황을 그린 것이다.
 

 사탕수수아리랑

 민들레아리랑

 FRAGRANCE OF SPRING / THE STORY OF CHOON HYANG

 

● 러시아의 아리랑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일제의 억압과 고통과 굶주림을 못 이겨 이곳으로 도망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자기 고향에서 민요와 음악과 춤을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스며 있습니다. 아리랑 고개, 우리 조국의 상징입니다. 아리랑은 그 고개를 넘어가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이 글은 사할린 거주 전수한(전 고려악단 단장)이 소장하고 있는 <아리랑>공책의 일부를 옮긴 <한겨레<(1995년 8월 12일자)신문에서 재 인용한 것이다.
 

 러시아아리랑

 치르치크아리랑

 

● 중국 아리랑

○ 삼림 속에 울려 퍼진 아리랑의 노래

일본 관동군 "토별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선다. 앞장에 선 "길 안내자"는 흰옷을 입은 조선족 노인이었다. 주위의 산봉우리를 둘러보던 노인은 목청을 뽑아"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이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노인은 일본군관의 군도아래 쓰러지고 포위망을 늘인 항일유격대들의 분노의 총소리는 노인이 못다 부른 "아리랑"의 노래 가락을 이어갔다. 중국 조선가족 가운 데 널리 알려진 항일투쟁 이야기이다.
중국민족학교 황유복교수의 글<중국의 한인들>(1986년ICSA편) 중에서
 

 중국아리랑

 아이령가

 장백의 새 아리랑

 아리랑망향가

 아리랑 연곡


○ 아리랑 노래의 고향땅 - 시인 김철을 찾아서

아리랑 아리랑 내 흥얼거립니다 / 아리랑노래의 고향땅에서 / 십여년전 당신의 시를 읊어봤더니 / 오늘도 그 노래 마음에 울립니다
아리랑노래의 민족시인이래서 / 당신은 철창에 갇혔더랬죠 / 철창이 어찌 당신의 목소리를 가두며 / 쇠채찍이 어찌 심장의 불길 끄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내 마음도 불길로 타 번집니다 / 새 시대는 시인에게 새 노래를 요구하나니 / 시의 벗이여, 더욱 높이 훨훨 나래치시라
중국 동포 계간지〈아리랑〉제1호(1980)에서
 

 기쁨의 아리랑

 광복군 아리랑

   

○ 한국청년공작대의 연극

제 2막은 가극이다. 무대 위의 아름다운 장면은 음악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는 아리랑고개의 풍경이다. 한 목동과 시골 색시가 사랑의 감정에 빠져 있는 가운데, 아리랑의 노래 소리가 울리고 태극기가 날린다. 지난 날 아리랑 고개의 태평스럽던 모습을 회상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이런 무대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건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노래 한 곡조를 마친 목동과 시골색시가 또 한 곡조를 부르려는 순간 총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왜병들이 달려들어 아리랑 고개 위의 태극기를 꺽어 버리고 일장기를 꽂는다. 두 사람은 곧 결혼하여 서간도로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것을 태극기에 맹세한다
삼십년 후 목동 부부는 혁명당의 일원으로 다시 고향 아리랑고개에 돌아와 일장기를 꺽고 태극기를 꽂으며 아리랑 노래를 부른다. 달려드는 왜병들을 다수 죽이고 두 사람은 죽음으로써 민족의 영웅이 된다.
조규일 교수(숭실대)의 글 <해방전 재미 한인사회의 연극>(<한국연극>19978)
 

 새 아리랑(1)

 새 아리랑(2)

 새 아리랑(3)

 쪽박의 아리랑

 아리랑 나의 아리랑

 내고향 아리랑총각

 사과배 따는 처녀

 아리랑 불고개 넘어넘어 


● 도움받는 자료
○ 한민족 아리랑 연합회(arirangs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