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놀이의 내력과 성격

● 탈놀이의 내력

탈놀이를 일컫는 대표적인 용어가 '탈춤'이다. 탈춤이란 본래 해서지방의 탈놀이를 일컫는 말로 지방에 따라 각기 산대놀이, 야류, 오광대 등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 탈을 이용해서 노는 모든 놀이를 '탈춤'이라 통칭하고 있으며, 1964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탈놀이가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있질 않다. 다만 그 기원에 대해 "풍물굿의 잡색놀이가 발전하여 극적 구조를 갖추면서 그 틀을 이루었다"고 하기도 하고 "무당굿에서 무당의 1인극 혹은 무당과 잽이와의 2인극이 발전하여 이루었다"고도 한다. 이들 주장은 탈놀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엇갈린 주장이지만 다 액을 막고 복을 빈다는 의미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탈'이라는 말에는 '탈났다, 배탈났다'처럼 액이 끼었다는 의미가 있는데, 바로 그 액을 쫓기 위해 도깨비 모양의 '탈'을 쓰고 탈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탈놀이를 다루고 있는 문헌기록 중 오래된 것으로 <삼국사기> 권 32 <잡지(雜誌)>에 보이는 최치원의 '향약잡영'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당시(신라시대) 행해진 다섯 가지 놀이(五伎)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대면'에서 "누런 금빛 탈을 썼다..."라는 시구가 나온다. 또한 "신라 황창이라는 7세의 소년이 백제왕 앞에서 검무를 추면서 백제왕을 죽인 후 죽임을 당했는데, 이를 슬퍼한 신라인들이 황창의 모습을 본떠 탈을 만들고 검무를 추었다."(<동경잡기>, <문헌비고>)는 삼국시대의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들어 국가에 의해 팔관회나 연등회 등의 행사에서 연희되던 탈놀이는 조선시대로 오면서 종교적 의미가 약화된 산대놀이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궁중의 산대놀이는 양란 이후 경비가 많이 소요되고 유교적 도덕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산대도감이 폐지되면서 일시 중단되기도 한다.
한편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는 당시(조선시대) 직업적인 광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한강 위에서 나무로 만든 귀신탈을 쓰고 걸식을 하는 광대가 있었는데, 봄이 되어 얼음이 녹기 시작할 무렵 아내가 강을 건너게 되었다. 이에 놀란 광대는 탈을 벗을 생각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통곡을 하며 도움을 청했지만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연극을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는 조선 후기의 모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탈놀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 후기적 양상으로 정착되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궁중의 산대놀이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즉 인조(12년) 때 산대도감이 폐지되면서 광대들이 경기 각 지방에서 산대놀이를 재생시켰고, 그것이 각 지방으로 퍼지며 정착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해서탈춤이나 야류, 오광대 등은 조금씩의 지역적 편차를 드러내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뿌리는 산대놀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9세기말까지도 활발히 연희되던 탈춤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침략 이후 산업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우리네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면서부터다. 긴 침체기를 겪던 탈춤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정부 주도의 '전통문화복원사업'과 민간 주도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탈춤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된다.


● 탈놀이의 성격

탈놀이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는데, 대개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신앙적 요소보다는 탈의 익명성(匿名性)을 통해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을 가하며 웃음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주로 정월 보름이나 단오에 벌어졌으며, 이를 통하여 한 해의 액운을 막고 풍농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탈놀이는 악사들의 반주음악에 맞추어 춤과 노래를 부르는 부분과 대사로 이루어지는 연극적인 부분이 어우러져 있는데, 놀이내용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크게 ①잡귀를 쫓는 의식무 ②파계승.양반에 대한 풍자 ③남녀간의 갈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여러 탈놀이들 중 하회별신굿탈놀이로 대표되는 서낭굿탈놀이와 다른 탈놀이들은 그 성격이 다르다. 다른 탈놀이들은 대개 장마당에서 연희된 탈놀이이거나 전문적 예인집단에 의해 행해진 탈놀이인 반면 서낭굿탈놀이는 농업마을에서 연희되던 것이다. 이 점은 하회별신굿탈놀이와 다른 탈놀이들이 서로 차이나게 하는 기본적 요인이다.

장마당에서 연희되던 탈놀이나 전문적 재인집단에 의하여 행해진 탈놀이들은 보다 풍부한 민중성을 갖추고 있게 마련이다. 반면에 농업마을에서 행해지던 탈놀이는 그러한 탈놀이들보다 민중성의 강도가 떨어지며, 종교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탈놀이의 목표가 서로 다르고, 탈놀이판에 모여든 관중들의 성격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장마당에서 연희된 탈놀이나 재인집단에 의하여 행해진 탈놀이의 일차적 목표는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장마당 탈놀이는 장마당의 번성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장마당이 번성하느냐 쇠퇴하느냐 하는 것은 장마당에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찾아들고 얼마나 많은 장사치들이 자리를 잡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장마당 탈놀이는 주 관객 층인 민중들의 '재미'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탈놀이의 조선 후기적 전개의 일반적 경향이다.


● 한국탈의 특징

탈은 그 자체가 훌륭한 조형미술품일 뿐 아니라 여러가지 상징성을 지닌 역사적 유물이다. 옛날 사람들은 탈을 씀으로써 진짜 그 힘과 영(靈)이 자신에게 깃 든다고 믿어, 재앙과 병을 가져오는 악신이나 역신(疫神)을 쫓으려 할 때는 그보다 더 무섭고 힘이 있는 가면을 쓰고 쫓아 버려야 한다고 여겼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6세기 경 신라시대의 '목심칠면(木心漆面)'이다. 이 탈은 죽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상시'탈로 고대 신라시대로부터 장례에 탈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탈은 몇몇 신성시되는 탈(창귀씨탈, 놋도리탈, 장군탈, 소미씨)를 제외하고는 놀이에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전국에 골고루 퍼져 있는 탈놀이들은 예능적인 면이 두드러지지만 액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민간 신앙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탈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탈들이 대개 무서운 표정을 한 신이나 토템을 표현해 공포감과 경외감을 주는 반면, 우리나라 탈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웃거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 인간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한국탈은 놀이를 하는데 편하게 제작되었다. 주로 바가지나 종이, 나무 등으로 만들어 가볍고, 탈보(헝겁)와 노끈을 탈 뒤쪽에 붙여 놀이꾼의 머리 뒤쪽을 가리고, 쉽게 쓰고 벗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눈을 크게 뚫어 놀이꾼의 시야를 넓혔고, 천을 두툼하게 이마에 대고 탈을 씀으로써 놀이를 할 때 탈이 벗겨지는 것을 막고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런 탈 자체의 특징은 탈놀이의 춤사위 폭이 크고, 껑충 뛰어오르는 등 역동적이고 신명나는 탈놀이를 가능하게 했다.

● 도움받은 자료
○ 대구대학교 한맥회 탈춤 자료
○ 진주탈춤한마당 자료집 1996-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