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탈춤 (康翎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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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형문화재 제 34호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강령리< 黃海道 甕津郡 富民面 康翎里 >에는 옛부터 탈놀이가 전승되어 왔다. '강령< 康翎 >'이라는 지명은 세종 10년에 설치한 강령현< 康翎縣 >에서 비롯되었고 인조 15년에는 해주에, 효종 4년에 옹진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10년 뒤에는 강령현으로 되는 등 변화를 겪다가 근세에 이르러 옹진군 내의 지역으로 개편되었다. 강령탈춤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밝힐만한 자료는 없지만 이러한 인근 지역과의 편입과 개편 속에서 성장하여 늦어도 조선 후기까지는 강령에 탈놀이패가 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세시풍속인 단오놀이 중 탈춤이 가장 대표적인 놀이로 되었던 것도 전승의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매년 단오에는 주민들(특히 상업자)의 자발적인 지원과 호응을 받아 탈춤을 추었는데 음력 5월 4일에는 길놀이를 하였으며, 5일과 6일에는 저녁부터 새벽무렵까지 밤새도록 놀았었다. 이 3일간은 해주 감영< 監營 >에 나가서 도내< 都內 > 각지에서 모인 여러 탈춤패들과 경연하였는데 우승하면 감사로부터 후한 상이 내려졌다 한다. 길놀이가 끝나면 밤늦도록 마을에서는 음식잔치가 벌어졌으며, 놀이는 구경꾼들이 집으로 모두 돌아가야 끝이 났다. 놀이마당은 주로 공청< 公廳 >의 앞마당(미곡시장)이 이용되었고 수백 명이 모여들어 즐겼다 한다. 황해도 탈춤은 두 갈래, 즉 평야지대를 대표하는 '봉산 탈춤형'과 해안지대를 대표하는 '해주 탈춤형'으로 구분하는데 강령은 해주 탈춤형으로서, 놀이 과장의 순서나 등장인물에는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제1과장은 사자춤·원숭이 춤이다. 제2과장 말뚝이춤(일명 첫목중), 제3과장 목중춤, 제4과장 상좌춤, 제5과장 양반춤, 제6과장 영감과 할미광대춤, 제7과장 노승춤인데 1경은 팔목중춤, 2경 취발이춤이다. 이 내용 중에서 마한, 진한, 변한, 양반 삼형제가 나와 양반의 근본을 찾고 말뚝이를 부르거나 말뚝이가 재담하는 과장은 경남의 오광대와 비슷한 점이 느껴진다. 또 할미광대가 물레를 돌리는 장면은 가산오광대의 그것과 같다. 황해도 탈춤이 경기의 산대놀이와 끊임없이 교류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것이나, 이와같은 오광대와의 유사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같은 지역의 탈춤이나 봉산탈춤과 구별되는 점을 들어보면, 첫째, 봉산탈춤의 탈이 이른바 귀면형의 나무탈인데 비해, 강령탈춤은 사실적인 얼굴의 탈로 이른바 인물탈이다. 둘째, 의상에 있어 강령탈춤의 기본의상은 주로 재색 칙베 장삼을 입고 그 소매 홍태기는 길어서 팔을 내리면 땅에 닿을 정도인데 비해 봉산탈춤의 기본의상은 색이 화려한 더거리이다. 셋째, 춤에 있어 강령은 느린 사위로 긴 장삼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춤을 추는데 이것을 장삼춤이라 부른다. 이에비해 봉산은 깨끼춤의 기본이다. 강령탈춤의 배역은 마부(2), 사자, 원숭이, 말뚝이(2), 목중(2), 상좌(2), 맏양반, 둘째양반, 재물< 財物 >대감, 도령, 영감, 할미, 용산삼개집, 취발이, 노승, 소무 등 20명이고 이밖에 취발이 아이는 인형을 쓴다. 소무와 용산삼개집 탈은 겸용하여 모두 19개가 된다. 현재 예능보유자는 김실자< 金實子; 1928년생, 둘째양반·마부 >, 김정순< 金正順; 1932년생, 상좌·용산삼개집 >으로 1970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도움받는 자료
○ 문화재 관리국 홈페이지 (www.ocp.go.kr)